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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사진/풍경 사진 - 제주도

한라에서 사계를 보다

by 자연 사랑 2022. 8. 6.

 

 

 

 

4년만에 다시 찾는 한라산,

설레이는 마음이야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설레임보다는 내가 한라를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4년전에는 대부대(7명)를 이끌고 리더의 역할까지 하면서도

날듯이 백록담을 넘었건만...

이젠 환자가 아닌가?

계단만 올라도 가슴이 쥐어짜는 듯 흉통이 오는데...

 

  

 

 

차편이 마땅치 않아 성판악을 기점으로 회귀산행을 하기로 했다.

심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서둘러야 한다.

성판악에서 정상까지 9.6Km, 정상 산행시간 4시간 반, 왕복 9시간,

정상적인 발거음이 아니니 10시간 이상을 예상하면 서둘러야 한다.

 

호텔에서 7시에 조식을 준다는데 그거 먹을 시간이 없다.

서둘러 6시에 출발해 성판악에 도착하니 6시 30분이다.

고맙게도 휴게소 문을 열었다(사실 전날 전화 확인)

 

해장국으로 뱃속을 채우고, 김밥 좀 싸 넣고 출발하니 7시 15분이다.

 

 

 

 

출발은 제일 빨랐는데

뒤따라 오던 산꾼들이 하나같이 앞질러 간다.

옛날 같으면(멀정하던 때) 조런 일은 있을 수 없었는데...

 

그러나 내 몸이 그러하고,

무리하다 싶으면 바로 하산할 맘으로 시작한 산행이니...

남들이 앞질러 가던 말든 거북이 걸음으로 살살 걸었다.

 

정말 아주 살살 걸었다.

동행 역시 이런 상황을 잘 알긴 하지만,

그래도 쪼께 미안하고 존심도 있고해서리...

 흉통이 오면 사진 찍는다는 핑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근디, 이게 뭔일이랴?

이렇게 무리하게 시작한 산행인데...

산행 시작한지 한 시간이나 지났는가 비가 온다.

아니, 이 한겨울에 왠 비냐?

 

 

 

 

참으로 박복한 놈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강심장인 줄 알았던 심장은 비실거리고,

모처럼 큰 맘 먹고 어렵사리 날잡아 뱅기 타고 예까지 왔건만...

 

이게 왠 청승이냐?

 한 겨울에 비라니...

아니 한 겨울의 한라산...

무릎까지 쌓인 눈을 찾아 예까지 왔지 않은가?

 

 

 

 

제길,

비가 주적거리니 제약이 많다.

우선 안경에 김이 서려 연실 안경을 닦아야하는게 일거리다.

1300 고지를 넘어서부턴 그 좋던 등로도 경사가 심한 너덜길로 변했다.

사진 찍는 흉내를 내며 쉬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진달래 휴게소에 도착했다.

전 같으면 요런덴 처다보지도 않고 지났쳤을텐데...

오르는 내내 이정표상의 남은 거리에 위안을 삼던차라 무지 반갑다.

10시 45분, 3시간 30분 걸렸다. 좀 긴 시간이긴 하지만, 요기까진 견딜만 했다.

 

 

 

 

진달래 휴게소로 들어서는 얼굴들이 너도나도 상기됐다.

주척이던 비도 잠시 물러가니, 휴게소 앞 진달래 밭이 가을 빛으로 변했다.

이건 완연한 가을이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단풍이다.

그러나 실은 조리대와 잎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진달래 나무가 그려낸 색의 마술일 뿐이다.

 

 

 

 

백록을 향해 11시에 출발을 했다.

이제부터 길은 좀 험했지만, 비는 그쳐서 수고는 좀 덜었다.

 

햐!

고것참!

듬성듬성 눈과 얼음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요긴 또 딴 세상이다.

 

이건 완전 한 여름이다.

요거이 또한 색의 마술이다.

초록 이끼가 시계를 반년이나 되돌려 놓았다.

 

 

 

 

그럭저럭(죽을 힘을 다해...)

1800 고지에 다달았다.

 

이제,

조 계단을 오르면 남한 땅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 정상이다.

근데 고게 장난이 아니다.

칼바람은 아니지만 안개비와 강풍으로 숨이 탁탁 막힌다.

어이없게도 한겨울에 산을 오르면서 이제야 겨울을 느낀다.

 

조기서,

정말 조기서 무지무지하게 많이 걸음을 멈추었었다.

흉통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큰 일 아닌가?

사알살, 아주 사알살...

 

 

 

 

오후 1시, 드디어 정상이다.

세상이 비구름 속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기럴...

백록담 보러가자고 꼬셔서 데리고 온 옆 동네 교감샘 미안해서 어쩐다냐?

 

 

 

 

정상을 지키는 관리인, 사진만 찍고 바로 내려 가라고 성화다.

하산 마지노 시간인 1시 30분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날씨가 개떡 같아 위험하다고 하산을 재촉한다.

재촉 안해도 시계가 재로인 요기선 더 이상 할 일도 없다.

 

내려갈 생각을 하니 걱정된다.

내려갈 길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1600고지까진 등로에 얼음이 섞여 있고,

성판악으로 가는 9.6 Km 내내 그 지긋지긋한 너덜길이니...

더구나 빗길이니...

 

 


 

아, 정확히 5시에 성판악에 도착했다.

여름 장마비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큰 맘 먹고 30만원이나 주고 산 트렉스타 중등산화도 10시간 물길을 걸으니 소용 없다.

신발 속에 물이 질퍽하다.(그 유명한 서귀포 쌍둥이 식당 횟집들어 갈 땐 맨발로...)

 

그래도

3일 동안 우리를 편안하게 길 동무가 되어 준 '허씨 아씨'(렌터카)를 만나니 살 것 같다.

 

비록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내려 온 긴 산행이었지만,

비록 한 겨울에 한여름을 헤매다 온 빗길 산행이었지만,

비록 백록도 못보고 정상에서의 증명 사진 한방에 만족해야하는 산행이었지만...

그래도 요렇게 사진을 보는 이 순간은 또다시 한겨울의 한라에서 한여름을 맞으며 빗 속에 서서 감흥에 젖어있다.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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